그는 내 오랜 친구였다.
그저 친구였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학 새내기 시절,
벚꽃이 흩날리던 캠퍼스였다.
그 시절의 기억은 늘 파스텔톤으로 빛나곤 한다.
희미한 꽃잎 사이로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봄만 되면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 다른 연인을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실패하던 시절.
우린 이상하리만치 자주 마주쳤다.
밤하늘에 걸린 별처럼
멀리 있어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 1막 – 새벽 두 시의 문자
그날도 평범하게 흘러가던 밤이었다.
그런데 시계가 새벽 두 시를 넘긴 순간,
휴대폰 화면이 미약하게 빛을 토해냈다.
“깨어 있어?”
짧은 문장.
단 하나의 문장.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묘하게 달아오르는 공기가 스며 있었다.
나는 ‘응’이라고 답장했다.
그러자 문장이 하나 더 도착했다.
“그냥… 네가 생각나서.”
이상하게도,
그 말이 밤공기를 조금 더 짙게 물들였다.
🌿 2막 – 경계의 이름
사람들은 이성 친구에 대해 말할 때
“선만 잘 지키면 된다”고 한다.
선이란 것이 마치 바닷가에 그은 선처럼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우리의 선은 늘 파도에 닿아 있었다.
밀물 때마다 사라지고,
썰물 때마다 다시 드러났다.
그날 이후,
그는 문득문득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퇴근 후,
야근 후,
금요일 밤과 일요일 새벽에.
“어디야?”
“오늘은 보고 싶다.”
그 말들은 별것 아닌 듯 흘러나왔지만,
들어보면 어딘가 부드럽게 날카로웠다.
나는 그 말을 부드러운 칼이라고 불렀다.
어딘가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베어내는 칼.
🕰️ 3막 – 영화 같은 한 장면
결국 어느 금요일,
우리는 오래전부터 가던 단골 바에 나란히 앉았다.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술잔 위로 빗방울 소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있잖아, 너랑 있으면 이상하게 편하고…
또 이상하게 설렌다.”
그 순간,
마치 화면이 슬로모션으로 전환되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빛은 내 마음 어딘가를 은밀하게 비췄다.
나는 애써 웃었다.
“우리 친구잖아.”
그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질 때,
내 심장도 같이 떨어져 내렸다.
✨ 4막 – 무너지는 경계
그 밤 이후,
우리 사이의 경계는 더 이상 선명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스치면
나는 그걸 우연으로 넘기지 못했다.
그의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뜨면
마음이 자주 뛰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과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치 두 개의 줄다리기처럼 내 마음을 당겼다.
언젠가부터
우린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나는 그냥 친구야.”
그 말들은
언제나 공허했다.
🌌 5막 – 현실과 선택
사람들은 말한다.
“이성 친구 사이에 선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선은 늘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커튼 같다.
누군가 다가오면,
살짝만 손끝으로 스쳐도
흔들리고,
어느 순간엔 스스로 찢어진다.
우리가 친구라는 이름 아래 지키고자 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존중 위에 쌓인 익숙함과
그 익숙함 속에 자라는 작은 호감은
마치 벽돌 틈새에 뿌리를 내리는 들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그 꽃이 무성해져서
우리가 처음 쌓아 올린 벽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 6막 – 끝과 시작
결국 어느 밤,
나는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우리 이제, 친구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우리는 오래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끝나고,
또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 에필로그 – 경계의 정의
이성 친구의 경계는
누군가의 말처럼
뚜렷하고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밤하늘을 스치는 별똥별,
한 잔 술에 녹아 사라지는 선이었다.
그리고 그 경계가 사라진 뒤에는
우정과 연정 사이에서
아무도 해답을 줄 수 없는 질문만 남았다.
✨ 한줄평
우리는 끝까지 친구로 남으려 했지만,
서로의 심장은 그보다 먼저 경계를 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