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도장에서 누굴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냥 운동만 하자고 다짐했었다.
퇴근하고 헬스장은 지겹고, 러닝은 혼자 외롭고,
뭔가 사람 냄새 나는 운동을 찾다 주짓수를 시작하게 됐다.
그 도장엔 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도 있고, 40대 직장인도 있고,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검은색 레깅스에 화이트 래시가드.
딱히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는데,
딱 한 가지, 눈빛이 달랐다.
스파링 전에 상대를 똑바로 보는 그 눈…
눈이 마주치면 이상하게 정신이 흐트러졌다.

처음 대화를 튼 건 내 쪽이었다.
그날은 파스가 떨어진 날이었고,
그녀는 항상 자신의 파스를 챙겨와서 도장에 비치해두곤 했다.
“저기 혹시… 그 파스 좀 빌려도 될까요?”
“아, 네. 이거 쓰세요~ 저는 오늘은 안 쓸 거예요.”
그 작은 대화 이후로, 점점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매트 위에서는 라펠 잡는 법이나 힙 이스케이프 얘기를 했지만,
쉬는 시간에는 티셔츠 어디서 샀냐, 도장 근처 카페는 어디 맛있냐,
자잘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어느 날, 스파링 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혹시 오늘은… 저랑 드릴 같이 해요!”
심장 쿵.
그날따라 그녀는 예전보다 더 밝게 웃었다.
그녀와 드릴을 하며 자연스럽게 손이 스칠 때마다,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백 컨트롤을 연습하다가, 내가 뒤에서 팔을 감싸는 순간
우린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립 잡으셔야죠.”
“아… 네! 죄송해요.”
땀이 났는데, 식질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꾸 민망한 미소가 나왔다.
그 이후부터 그녀랑만 자꾸 롤을 돌게 됐다.
서로 핑계도 잘 붙였다.
“오빠, 저 오늘 바텀만 할 거예요.
그러니까 탑 해주세요~.”
“그럼 내가 오늘은 무조건 패스해볼게요.”
물론, 내가 못해서 거의 다 막혔지만…
그녀는 항상 “방금 진짜 좋았어요” 라고 웃으며 말해줬다.
결정적이었던 건 도장 MT였다.
운동 끝나고 근처 고깃집에서 뒷풀이가 있었고,
술 한잔 들어간 그날, 그녀가 슬쩍 내 옆으로 왔다.
“요즘… 오빠 없으면 심심해요.”
"진짜요?"
"응, 같이 롤 돌다가 안 보이면 허전해."
그 말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엔 명확히 무언가가 생겼다.
‘연인’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썸.
그립은 풀지 않았지만, 그걸로 서로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여전히 썸이다.
가끔은 사소한 걸로 토라지고,
가끔은 롤하면서 괜히 팔 잡을 때 힘 살짝 빼주고.
아직 명확한 고백은 없었지만,
도장 사람들도 이제는 “둘이 사귀는 거 아냐?”라고 눈치챈다.
하지만 괜찮다.
주짓수처럼, 이 썸도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포지션 잡아가면 되니까.